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9세 (문단 편집) === 독실한 가톨릭 군주 === || [[파일:Louis_IX.jpg|width=100%]] || || 걸인들의 발을 씻어 주는 루이 9세(14세기 채색 삽화) || 프랑스 군주 중 유일하게 시성된 왕으로 [[미국]]의 [[세인트루이스]] 시, [[프랑스]]의 생 루이 섬, [[브라질]]의 상루이스 시 등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聖) [[루도비코]]'''로 표기하고 있으며, 축일은 [[8월 25일]]이다. 다만 현재 가톨릭에서 [[흑역사]] 취급하는 십자군 공적[* [[알비파]] 십자군 포함, 다만 알비파 십자군 시절에는 아직 어려 [[섭정]] 중이었다.]이 있었고, [[반유대주의|반유대주의자]]인데다가[* '''"신성 모독자와 토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일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나치]] 시대처럼 [[유대인]]에게 가슴에 '노란 별'을 달고 다니라고 강제한 것은 루이 9세의 조치가 원조였다. 다만 [[한나 아렌트]]는 [[중세]] 시절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한 [[반유대주의]]와 이미 [[유대인]]이라고 할 만한 특성이 사라진 사람들에게 발동한 [[근대]]의 반유대주의를 구분하여 둘의 동일시는 피하고 있다. 반면 [[20세기]] 종교학자 겸 유대인 [[랍비]] 이스마 엘보겐은 저서《독일 유대인의 역사》에서 "[[중세]] 시절 [[십자군]]과 [[흑사병]] 시기 유대인 학살이 근대 이후의 반유대주의와도 크게 연관되었다."고 본다.] 후손인 [[필리프 4세]]가 막나갈 때, "네 조상 좀 본받아라."라는 [[교황청]]의 정치적인 의도가 시성에 영향을 주었다.[* 물론 시성이 취소되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중세 사람이 시대적 한계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현대인과 동일한 책임을 묻기도 어렵고, 루이 9세가 당대의 군주들 중에서도 신심이 깊은 인물이었다는 것에는 크게 이견이 없다. 다만 십자군이 "루이 9세의 신심을 돋보이게 하던 요소"에서 "루이 9세의 신심이 보여주었던 안타까운 오류"로 평가가 바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루이 9세가 이미 살아있던 시절에 성인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신심이 매우 깊은 군주이기는 했으나, 그의 시성이 사후 27년 만에 이루어진 것은 이러한 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의 신심과 후대의 정치적 상황 등이 모두 시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었겠지만 말이다.[* 위에서 인용한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고 있는데, "물론 이 시성식은 이 당시 프랑스 왕인 필리프 4세와 교황 사이의 정치적 협상의 결과였지만 루이 9세가 당대인들의 생각에 충분히 성자(聖者)로 시성될만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는 점 또한 사실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즉, 원래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좀 더 일찍 시성되었다 정도?] 지금도 [[전통 가톨릭]] 신자들이 [[에콰도르]]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 대통령과 함께 통치자 · 정치인의 이상으로 특별히 존경하는 [[성인]]이다. 전통주의 사제들이 강론 중에 자주 언급하는 성인 중 한 명이라고 한다. [각주] [[분류:프랑스 국왕]][[분류:카페 가문]][[분류:십자군 전쟁/관련인물]][[분류:1214년 출생]][[분류:1270년 사망]][[분류:가톨릭 성인]][[분류:시성된 가톨릭교도 군주]][[분류:성공회 성인]][[분류:푸아시 출신 인물]][[분류:소화기질환으로 죽은 인물]][[분류:프랑스의 객사한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